14일 예술의전당
라벨 피아노곡 전곡 연주
조성진 데뷔 10주년·라벨 150주년 헌정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숨결부터
'밤의 가스파르'까지 고밀도의 미학 표현

밤의 가스파르를 포함해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피아노곡 전곡을 180분에 걸쳐 연주하는 일은 철인3종경기보다 수백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달리는 울트라마라톤에 비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만큼 한 무대에서 전 곡이 연주되는 일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매 연주에서 피아노는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을, 가장 센소리와 여린 소리를, 가장 빠른 속도와 느린 속도를 내야 한다. 정밀한 타건 기계가 된 피아니스트는 때로는 새와 배 또는 물과 종소리가 되거나, 바다 풍경이나 밤의 몽상, 왈츠가 울려 퍼지는 무도회장을 그리는 수채화 화가가 돼야 한다.

불협화음의 거친 음표로 시작한 ‘세레나데 그로테스크’에서 조성진은 피아노의 울림을 확인하는 듯 자유자재로 음의 무게를 조절하며 연주를 이어 나갔다. ‘고풍스러운 미뉴에트’에서는 우아하게 미끄러지면서도 탄력 있는 리듬 표현으로 이날 공연에서 펼쳐질 장면들을 예고했다. 전반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연주였다. 라벨은 “왕녀를 위한 죽은 파반느”가 아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되어야 한다며 연주가 너무 느려지거나 감상적으로 되는 것을 경계했다. 조성진은 수채물감으로 그린 세밀화처럼 섬세하게 연주를 이어갔는데, 음이 쉬어가는 순간의 공기마저 끌어 쓰며 곡 전체의 완성도를 높였다.

프로그램의 중앙에 배치된 두 작품은 라벨의 연대기에서도 중요한 곡으로 꼽힌다. 어려운 리듬 속에서도 고매함을 잃지 않은 조성진의 연주가 빛을 냈던 순간으로 ‘거울’의 세 번째 주제인 ‘바다의 조각배’는 단연 이날 공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을 만들어냈다. 집중력과 순간을 압도하는 힘을 요구하는 이 곡에서 조성진은 한 명의 무용수로 변했고, 건반 위를 춤추며 음표들을 끌어냈다. 수차례의 공연을 거치며 최고조에 오른 기술력으로 곡의 해상도를 높여가며 객석의 몰입을 자아냈다. 이어진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에서도 조성진은 우아함을 잃지 않고 복잡한 리듬을 넘나들었다.

마지막 세션에서는 오랜 시간 공연에 함께 집중해 준 관객들을 위해 안부를 전하는 듯한 ‘하이든 이름에 의한 미뉴에트’로 시작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에서 조성진은 특유의 우아한 터치와 완급조절로 곡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 곡은 훗날 더해진 유혹과 구애의 스토리를 따라 농밀하고 아이러니한 관능미를 담은 해석이 많았는데, 조성진의 연주는 그보다 악보 곳곳에 숨겨진 유머를 드러내며 듣는 이를 미소 짓게 만드는 세련된 우아함을 뽐냈다.

세 시간에 걸친 공연 독주회는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객석에도 상당한 인내심과 체력을 요구한다. 하여 지난 2월 샌프란시스코 공연을 비롯한 일부 연주회에서는 3부가 끝나기 전에 객석이 비었다는 후기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공연에는 대부분의 청중이 마지막 울림까지 집중하고, 열화와 같은 박수로 완주에 성공한 피아니스트를 격려했다.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거장이 탄생하는 10년의 역사에는 그 연주에 같이 침잠할 수 있는 관객이 있었음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조원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