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마리가 뒤엉킨 뱀 페스타토토 한 여성의 ‘슬픈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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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유창선의 오십부터 예술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는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두 건의 전시가 8월 상순부터 열리고 있다. 10년 만에 새롭게 기획한 천경자 컬렉션 상설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에서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 특히 해외 여행을 하면서 그린 페스타토토들이 많이 전시됐다. 함께 열리고 있는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은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시기를 거쳐 민주화에 이르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천경자를 포함한 여성 작가 23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페스타토토들이 전시되어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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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페스타토토 전설'을 가졌다 여긴 화가
작품으로 보는 인간 '천경자'의 삶
3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35마리의 뱀들이 뒤엉켜 있는 페스타토토이 눈에 띈다. 이 징그럽고 기괴한 페스타토토이 천경자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 <생태>(1951)다. 천경자는 아름다운 많은 소재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뱀들을 그렸을까.
“그 속에서 나는 밤마다 뱀을 어떻게 화면에다 깔아 구도를 잡을 것인가, 눈을 감은 채 구상했다. 그 판국에 어찌 찔레꽃 향기를 찾는, 시설이 깃든 배 따위를 그리겠는가? 차라리 뱀 수십 마리를 화면에 집어넣음으로써 슬픔을 극복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천경자, 『내 페스타토토 전설의 49페이지』)
천경자가 말한 ‘그 판국’은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의미한다. 사랑했던 동생 옥희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자와의 사랑은 고통만을 남겨주었다. 생계를 감당하기도 어려웠다. 천경자는 그 슬프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생태>를 그렸다. 마치 험난한 세상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뱀과 같이 독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각오라도 하듯이.
페스타토토 말라버린 검붉은 관목 히스와 누런 갈대밭이 거센 바람에 몰아치고 있다. 회색빛 하늘과 맞닿은 황량한 황무지, 바람에 휘감기듯 흔들리는 갈대가 눈에 들어온다. “에밀리 브론테는 폐결핵으로 일찍 죽었지만 빵 굽는 솜씨가 좋았다는데 우리 여동생 옥희가 살았더라면 한국의 브론테 같은 여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으로 자위를 해 보았다.” 천경자의 <폭풍의 언덕>에는 자신과 가족들의 삶이 담겨 있다.
천경자는 색이 좋아 페스타토토을 시작했던 화가였다. 그녀는 채색화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담은 페스타토토을 그리곤 했다. 자기 작품을 특정한 틀에 가두지 않고 채색화 작업에 몰두했다. 그런데 8.15 해방이 되고 나자 일본에서 유행했던 채색화를 무조건 일본화로 규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채색화는 홀대받아 대부분의 작가들이 수묵화를 그리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천경자는 채색화를 버리지 않고 묵묵히 그에 정진했다. 천경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해방이 되자 내가 좋아하는 색채를 다룬다고 해서, 일본화가 무엇인지 한국화(동양화)가 무엇인지 분별조차 못하던 당시 일부 동양 화단에서는 때마침 정치적으로 민족반역자로 친일파를 몰아치던 시류에 맞춰 내 작품도 무조건 일본화라고 몰아, 싹트기 시작한 내 예술 사상을 구둣발로 무참히 문질러 댔다. 그것을 보고 놀란 약삭빠른 색채 화가들은 모조리 수묵화의 대열에 끼었지만 나는 계속 좋아하는 색채화를 그렸다… 얼마쯤 지나니까 일본화라는 말이 들어가더니 이제는 내 작품을 서양화라고 했다. 도무지 귀찮은 일이었다.”
“살아가는 데 있어 무척 조심을 한다 해도 명암이 기울었다 폈다 하는 운명의 장난으로 그날의 일진이 어두운 쪽으로 기울면 어디에선가 엉뚱한 오해와 모함이 꾸며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유유자적하던 옛날처럼 초연한 자세로만 살 수 없는 현대일수록 늘 새로운 날벼락, 25시에 대비해서 살아가야 되니 인생은 피곤하다. 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자기를 아끼고 초연히 살고자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살이다.” 이것이 어디 천경자만의 얘기일까. 그저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아끼며 조용히 살고자 해도 험난한 세상살이는 우리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는다. 그래서 예술이 필요한 것일 게다.
유창선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