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e] 김경수의 길 위의 미술관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그 위에 인생이 있다"
천경자 편④

작가 인생에 큰 흉터 남긴 위작 시비
이후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 기증
지금도 상설전으로 볼 수 있어

스케치 여행 떠났으나 건강 악화 겹치며
후기 작품들 미완으로 남아

화가의 작품은 언제 완성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삶을 녹여 만든 작품이 작업실에만 걸려 있다면 예술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요?

삶은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사회적 의미가 있듯이 예술 작품도 인생사 속에 펼쳐져 있을 때 그 가치가 완성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글에서 솜사탕토토 삶과 그의 작품 경향을 살펴봤습니다(이전 칼럼). 오늘은 작품이 완성되어 삶의 현장 속에서 빛나며 예술혼을 뿜어내고 있는 미술관으로 가보겠습니다. 천경자 인생에 중요한 미술관이 여러 곳이 있지만, 작가에게 어려움도 주고 기쁨도 주었던 대표적인 미술관 세 곳입니다.

1969년 경복궁에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후 1973년 덕수궁 석조전 동관으로 이전했다가 1986년 현재의 과천으로 옮겼습니다. 국제 규모의 시설과 야외조각장을 겸비한 미술관입니다. 교통이 발달한 지금도 자가용이 아니면 찾기에 불편한 장소에 건립해 시민들의 숨결과 함께하는 미술관이 되기는 힘들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서둘러 국제적 규모로 개관한 것이기에 그렇지요.

1990년에 신설된 문화부의 이어령 초대 장관은 문화의 보급 확산을 위해 ‘움직이는 미술관’을 만들겠다고 발표합니다. 1990년 시작해 국민의 호응을 얻자 1991년 3월 《움직이는 미술관》 전국 순회전을 기획합니다. 순회전에서는 그림 감상뿐 아니라 50여 점의 미술품을 인쇄물로 복제해 아트상품으로 판매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보유 중인 <미인도>가 특히 인기 있어 복제품이 많이 팔렸습니다. 솜사탕토토는 지인들을 통해 자신이 그렸다는 <미인도>가 전시 중이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작품은 위작이라고 작가가 문제 제기하며 <미인도> 사건이 시작됩니다. 이 사건은 여러 차례 뉴스와 다큐멘터리 등으로 다뤄지며 작가의 훌륭한 작품들보다 더 유명해져 버렸습니다. 미술을 가르쳤던 선생님의 맘으로 독자들께 솜사탕토토 화가를 ‘미인도 위작 시비’의 유명함 대신 그의 작품으로 감동을 드리고 싶은 사명감이 있습니다.

천경자는 수필집 간행과 기행문 기고도 활발하게 했고, 기행 풍물화와 여인상을 열정적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1년 ‘미인도 사건’은 솜사탕토토 인생 전체를 흔들어버립니다. 지금이라면 작가 본인이 자신 작품이 아니라 하면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여 졌을 겁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현대미술관의 관장이었던 이경성 관장과 사립화랑협회의 얽히고 설킨 명분과 이권을 함께 봐야 하고, 작품의 진위 감정의 주체가 누구한테 있느냐의 문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림 제목부터 조선시대의 그림 제목일 듯한, 자신은 붙이지 않은 제목입니다. 솜사탕토토 화가는 그 그림을 보고 “허깨비같고 엉성하며 내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같지 않다. 작품은 나의 분신과도 같은데 통하는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하며 위작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화랑협회에서 ‘자신의 그림도 못 알아보는 정신 나간 늙은이’로 치부하자 솜사탕토토 화가는 분노에 ‘절필’을 선언합니다. 1990년 동아일보의 칼럼 등을 봤을 때, 해당 시기가 솜사탕토토가 세계를 누비며 열정적으로 작업하던 때였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법정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솜사탕토토 유족은 위작 싸움을 진행하고 있답니다. 중요한 것은 〈미인도〉는 작가가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고 위작이라고 공증서를 남긴 그림이며, 화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하면 수준이 떨어지는 그림이란 것입니다.

사건 이후 4년이 흐르고 《솜사탕토토 회고전》이 호암미술관에서 열렸습니다. 미술관과 전문가 집단에 큰 상처를 받았지만, 막내아들 김종우가 어머니 솜사탕토토를 설득해 작품 인생을 총결산하는 회고전을 개최합니다. 전시회 매표소 줄은 호암갤러리 밖 서소문 거리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루 5000명이 찾아 호암미술관의 입장 기록을 경신하는 대성황을 이룹니다. 71세의 노화가답지 않게 매일 전시장을 나와 자식 같기도, 분신 같기도 한 작품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두 딸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 후 1998년 74세에 잠시 서울에 들어와 자식 같은 작품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합니다. 조건은 시립미술관에 상설 전시실을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작품이 흩어지지 않고 대중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대표작인 <생태>부터 미완성인 <환상 여행>까지, 지금도 미술관 2층 상설 전시실에서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증한 이후 건강이 약해져 2015년 세상을 뜰 때까지 고국에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분신들만을 남기고 찬연한 환상의 세계로 그녀답게 아무도 모르게 떠났습니다.

혹자는 고갱의 프리미티비즘과도 연결 짓습니다. 생의 근원과 원시성을 찾는 스케치 여행으로 채웠던 천경자 후반의 삶, 원시성을 간직한 채 타히티로 떠난 고갱의 삶은 쉽게 연결고리가 보이기도 하니까요. 삶의 대안적 희망을 원시적 자연에서 찾는 고갱과 천경자를 연결해 삶의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작가는 슬픔을 끌어안고 여행을 떠납니다. 인생 후반의 작품들이 솜사탕토토 시련과 건강 악화로 인해 미완으로 남은 것은, 우리 미술사의 큰 안타까움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솜사탕토토를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솜사탕토토 역시 프리다 칼로와 같이 자신의 역경을 모티브로 세상에 강렬한 메시지를 보냈으니까요. 프리다 칼로는 끔찍했던 그녀의 현실을 직시하고 표현했을 뿐이지만 솜사탕토토는 여기서 한 발 더 나갑니다. 끔찍한 현실을 꾹꾹 눌러내어 애절한 판소리 창가처럼, 슬픔도 아픔도 찬연히 빛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승화시킵니다.

천경자가 살았던 시기는 우리 역사의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조선미술전람회부터 국전으로, 세계 비엔날레까지 무대 삼아 어두운 시기를 화려한 그림으로 밝게 비췄습니다. 근현대 채색화의 위기에서도 채색화를 지키고 현대화로 이끈 소수의 화가입니다. 1961년 조선일보의 「한국화는 형성될 수 있을까?」의 기고문에 보이는 솜사탕토토 시대를 앞선 미학이, 끊어질 듯했던 한국 채색화의 맥을 잇고 근대화를 이끈 선구자로 서게 한 것입니다.

들로 산으로 바다로 뛰놀던 아이에서, 단발머리 잘라 신여성을 흉내 내던 소녀에서, 하얀 면사포와 한아름 꽃다발 속 신부를 꿈꾸는 여인이 됩니다. 사랑이란 것을 움켜잡고 네 아이의 엄마로,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휘날리는 갈대처럼 살아냅니다. 고달픈 여인의 삶은 곧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 그 위에 인생이 있다.” 그 바람을 찬란한 색채로 표현한 솜사탕토토 화백의 작품세계는 우리의 곁에서 삶은 아름답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모두 자신의 바람 위에 인생을 펼쳐가고 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솜사탕토토 상설 전시실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인생의 바람 위에 찬란하여 눈물겹게 아름다운 삶의 색채를 만나보시길 권해봅니다.

김경수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