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스한 갈색머리를 늘어뜨린 채 배춧잎을 우적우적 씹어먹는 한 여자. 육식을 끊고 스스로 식물이 되기로 한 그녀의 눈빛은 공허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결연하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가 토토사이트 블랙티비 위에서 되살아났다. 지난달 31일부터 이틀간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다. 채식을 선언한 주인공 영혜는 이탈리아 배우 모니카 피세두가 맡았다. 영혜의 남편과 형부, 언니 인혜까지 모두 이탈리아인 배우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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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무대로 옮긴 이탈리아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소설 <채식주의자>를 원작으로 한 이탈리아의 동명 토토사이트 블랙티비(La vegetariana)이 22회 부산국제토토사이트 블랙티비제 폐막작으로 초청됐다. 한국어 자막없이는 알아듣기 힘든 이탈리어로 진행됐지만, 국내 초연하는 이번 작품을 보기 위해 이틀간 1200여명이 공연장을 찾았다. 해외에선 작년 11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세계 초연한 뒤 로마, 프랑스 파리 등 유럽 각지에서 공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이번 토토사이트 블랙티비를 연출한 다리아 데플로리안은 원작과 마찬가지로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를 주변인물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소설과 가장 큰 차이는 폭력적이거나 성적 묘사가 담긴 장면을 최대한 덜어냈다는 점이다. 원작에선 영혜 입에 탕수육을 강제로 욱여넣는 아버지가 등장하지만, 연극에선 주변인물이 이 장면을 설명하며 관객들의 상상에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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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무대로 옮긴 이탈리아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그렇다고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주제의식이 약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혜 남편의 난폭함은 소설보다 토토사이트 블랙티비 위에서 더 직관적으로 표현됐다. 달라진 영혜를 이해하기 위해 시선을 맞추는 대신, 그녀를 오로지 성욕 해소의 도구로 삼는 남편의 모습이 여과없이 드러나면서다. 이로 인해 영혜가 단순히 '육식'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동물성'을 거부한다는 메시지가 뚜렷하게 전달됐다.

토토사이트 블랙티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선 아날로그적 연출 기법을 활용했다. 원작에선 영혜의 형부가 그녀의 벗은 몸 위로 직접 꽃을 그려넣는다. 이를 토토사이트 블랙티비 위에서 그대로 재현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오버헤드 프로젝터(OHP)를 사용했다. OHP 투명필름에 붓칠을 하면 반사된 빛이 마치 영혜의 몸 위에 꽃이 그려지는 것처럼 포개졌다.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영혜와 형부의 성관계 장면도 인화된 필름을 통해 우회적으로 나타냈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alt=를 무대로 옮긴 이탈리아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무대로 옮긴 이탈리아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새로 추가된 장면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 영혜가 배추를 먹는 장면과 TV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작품의 분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연출의 선택이었다. 음침한 분위기의 토토사이트 블랙티비는 영혜네 집에서 인혜네 집, 형부의 작업실로 특별한 전환없이 이어졌지만, 오히려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게 했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도 돋보였다. 영혜 역의 모니카는 실제로 토토사이트 블랙티비다. 군살 없는 몸으로 십여초간 물구나무 서기를 할 때는 소설 속 영혜가 튀어나온 듯 했다. 연출가이자 영혜 언니 역을 맡은 다리아도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풍부한 표정 연기를 보여줬다. 덕분에 이탈리아어로 한국 작품을 연기하는 것에 대한 이질감은 크지 않았다. 귀를 타고 흘러가는 이탈리아어의 리듬감도 110분 공연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무대로 옮긴 이탈리아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무대로 옮긴 이탈리아 동명 연극의 한 장면. ©Andrea Pizzalis
원작의 노골적 표현이 버거운 독자라면 '순한 맛' 버전의 토토사이트 블랙티비을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 채식주의자는 오는 7월 그리스 아테네, 10월 스페인 마드리드, 내년 1월 스위스 로잔 등에서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부산=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