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바이오기업이 올 들어 잇달아 기술 수출에 성공하며 누적 계약 실적 10조원을 돌파했다. 글로벌 대형 제약사뿐만 아니라 뷰티기업까지 K바이오의 경쟁력을 높이 평가해 앞다퉈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이 같은 추세라면 올해 제약·바이오 분야 기술 수출이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올 들어 국내 바이오기업이 글로벌 기업에 기술 수출한 실적은 공개 금액 기준으로 총 10조2941억원에 달한다. 이미 지난해 전체 실적(7조5386억원)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2021년 사상 최고 기록(14조516억원)을 넘본다. 한국계 미국 벤처캐피털인 솔라스타벤처스의 윤동민 대표는 “중국이나 일본 대신 한국 시장에 주목하는 글로벌 제약사와 투자사가 늘고 있다”며 “국내 바이오 기술력과 임상 경쟁력이 한층 높아진 덕분”이라고 분석했다.
이날 아리바이오는 아랍에미리트(UAE) 아르세라와 최대 8130억원 규모의 알츠하이머 치료제 신약 기술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올릭스는 전날 프랑스 뷰티기업 로레알과 공동 연구 형태의 모발 화장품 기술을 수출하는 계약을 맺었다.
조(兆) 단위 계약도 줄을 이었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지난 4월 영국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에 최대 4조1000억원 규모의 신약 플랫폼 기술을 이전했다. 알테오젠은 3월 영국 아스트라제네카와 최대 1조9600억원 규모 계약을 맺었다. 허혜민 키움증권 연구원은 “국내 바이오기업들이 기술 수출 실적에 힘입어 추가로 기술 수출 성과를 내는 선순환 구조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바이오 원석 발굴하자"…빅파마·VC·뷰티사, 돈 싸들고 韓 온다 '뉴코-크리에이션' 트렌드…게임 체인저급 플랫폼 기술
글로벌 제약·바이오기업과 뷰티기업, 투자사들이 돈 보따리를 싸든 채 K바이오를 찾고 있다. 한국이 바이오 분야에서 경쟁력을 쌓고 우수한 임상 환경 등을 인정받아 글로벌 협업 파트너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글로벌 바이오업계에서 중국, 일본에 비해 덜 주목받은 한국이 아시아의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허브로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 줄지어 방한하는 미국 VC
10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베인캐피탈, 디어필드, 아치벤처스, 솔라스타벤처스(아주IB투자 미국 법인) 등 미국 벤처캐피털(VC) 관계자들이 K바이오에 투자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조셉 정 아치벤처스 벤처파트너는 “미국과 유럽에서 수백 년간 축적한 기술을 한국이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며 “기술력 있는 한국 바이오 및 의료기기 관련 기업과 협력을 모색 중”이라고 밝혔다.
이들 VC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중국, 일본과 차별화한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윤동민 솔라스타벤처스 대표는 “중국이 한국보다 바이오 기술 이전이 많지만 중국의 기술 이전 100건보다 한국에서 이뤄진 두 건이 더 승률이 높을 수 있다”고 말했다. 솔라스타벤처스는 단순 투자를 넘어 직접 신약 후보물질을 찾아 회사를 설립하고 경영에도 참여하는 ‘뉴 코크리에이션(New Co-creation)’ 방식으로 K바이오에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지난달 국가신약개발재단(KDDF) 행사에 참석한 노엘 지 노보홀딩스 파트너는 “4년 전과 달리 최근에는 중국 대신 한국을 선택할 정도로 글로벌 기업이 한국에 두는 관심이 커졌다”고 했다.
미국 VC는 한국에서 전반적인 바이오 분야를 투자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에번 그리프 베인캐피탈 파트너는 “종양, 면역질환, 희소질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루 투자 대상을 살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제약사들도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미국 머크(MSD)의 야시로 고지 아시아 사업개발(BD) 총괄은 지난달 ‘바이오코리아 2025’에서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 제약사들이 지닌 존재감이 뚜렷하다”며 “한국 특유의 빠른 실행력과 창의적 역량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K바이오 기술을 뷰티산업에 접목하려는 글로벌 기업도 나오고 있다. 프랑스 로레알은 세계 100여 개 바이오벤처 기업과의 협업을 검토하다 이달 올릭스와의 공동 연구를 최종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 韓 플랫폼·RNA 기술 돋보여
글로벌 기업과 투자자들을 사로잡은 K바이오의 강점은 ‘플랫폼 기술’에 있다. 윤 대표는 “한국에는 약물 전달체나 장기지속형 등 플랫폼 기술에 강점을 가진 기업이 많다”고 설명했다. 플랫폼은 단일 신약 후보물질이 아니라 여러 약물에 두루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에이비엘바이오가 영국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에 4조1000억원에 기술이전한 플랫폼 ‘그랩바디-B’는 약물이 뇌 안쪽까지 도달하도록 돕는 기술이다.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등 뇌질환 치료제 개발에 큰 장애물로 작용하는 뇌혈관장벽(BBB)에 침투하도록 한다. 허혜민 키움증권 연구원은 “국내 바이오기업들이 굉장히 이례적으로 올해 글로벌 제약사에 네 건의 기술을 연달아 이전했다”며 “이 중 두 건은 신규 거래라는 점도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리보핵산(RNA) 치료제 개발사들의 성과가 두드러졌다. RNA 치료제는 소분자, 항체보다 불안정성이 높아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만큼 국내 개발사의 기술력과 임상 수준이 증명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알지노믹스는 5월 미국 일라이릴리와 최대 1조9000억원 규모 계약을 맺고 유전성 난청 치료제를 공동 개발하기로 했다. 이 회사는 RNA를 편집하는 원천 기술을 보유했다.
K바이오의 갈 길이 아직 멀다는 평가도 나온다. 김 알버트 한국MSD 대표는 “한국은 혁신 기술 수용 속도가 빠르다”면서도 “일본 다케다제약 등과 같은 글로벌 빅파마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 기반이 더욱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